영화'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때는 조선인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던 일제강점기
간도에서 함께 자란 두 청년 윤동주와송몽규.
시인이 되고 싶지만 집안의 반대와 시대적 상황에 매번 부딪히는 윤동주와
직접 행동하여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했던 송몽규
둘은 오랜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현 시대를 대처하고 있었기에
끊임없이 대립하고 성장해 나간다.

처음에 이 영화가 흑백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색감이 주는 심미성이나 고화질 색감에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어쩌면 답답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실제로 영화를 감상해보니 흑백 영화라는 이질감보다는 매우 담담하고 관조적으로 스크린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런 시각이 시인이 되고 싶고, 조선어를 쓰고 싶고,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윤동주 시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송몽규라는 독립 운동에 능동적이고 실천하려는 인물과, 성격적으로나 독립 운동에 있어서나 다소 내성적이고 정적인 윤동주라는 인물간의 이념적 대립이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를 잘보여주었다. 직접 행동하고 상황에 맞게 이념을 변화하는 것이 옳은 독립 운동의 길일까, 아니면 이념적인 중심을 잡고 문학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하나 하나를 깨우는 것이 옮은 독립 운동의 길일까?  
행동하는 것은 영화의 결말처럼 매우 극단적이고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의지는 영화에서 처럼 매우 미미한 결론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청춘들에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송몽규, 윤동주 둘은 비극적인 상황을 개선하려는 방식은 달랐지만, 서로가 가지고 있던 '조선사람으로 살고 싶은' 그 당연하고도 순수한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그런 이념적 대립도 좋지만 이 영화에 좋은 장면은 따로 있다. 영화 속에서 중간 중간 13편의 시를 나레이션으로 읊어주는 장면이다.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최대한 시의 작성 연도와 영화의 연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읊어 주는 시는 따뜻하게 어우러져 가만히 심금을 울린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가장 처음 접하는 경우는 대개 국어책 교과서 일것이다. 그때 우리는 시를 읽었던가? 아니면 시를 풀었던가?
친구는 '처음으로 시를 만난것 같다.' 라고 했다.(수능 언어 만점 받음.) 시는 항상 풀고 해석하고 답을 도출해야만하는 '문제'중에 하나였는데, 그게 아니라 시를 느끼고 시의 구절에 감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시를 읽은 것이다. (한국 교육에 폐해를 넌지시 얘기하려다 말고) 시를 시 로써 접하게 만들어 준것만으로 이 영화가 가진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숨을 거둔 29세의 나이까지를 다루는 전기 영화이기때문에 2시간안에 일대기를 나열하고 감동을 주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애를 전부 표현하려고 하다보면 연출적이 면에서 중간 중간 개연성이 없어져버리거나  배우들에 감정선이 급격하게 변화하여 관객들이 공감하기 어려워져서 감상에 흐름이 어긋나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시간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내용을 간결하게 편집하여 관객들의 감정이입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간다. 연출력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한 장면마다 아름다움과 시와 안타까움, 애잔함, 따뜻함등 여러 감정이 어우러져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의 시 같고, 송몽규의 열정 같기도 하다.
좋은 시집을 한편 읽은 것 처럼, 조용히 두눈을 감고 되새겨 보기 좋은 영화이다.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이여진'이라는 역할을 연기한 여배우인데, 아마 동주라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니였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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