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전 : 가식없는 색감의 표출 물감


마크 로스코전을 선택했던 개인적인 계기는 우선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항상 다른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얼핏 접하였을 뿐, 실제로 전시회를 통해서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한 적은 없어서 이다. 그런 식으로 접했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은 그 가격이나, 혹은 작품성에 대해서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회를 통하여 내 스스로 진지하게 감상하였을 때, 그것들의 깊이나 이해를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마크 로스코전 을 선택하였다.


마크 로스코전은 신화의 시대, 색감의 시대, 황금기, 벽화의 시대, 로스코 채플, 부활의 시대로 총 6개의 테마로써 마크 로스코의 생애를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감상 하게 된 신화의 시대의 마크 로스코 초기 작품들은 인물과 배경이 존재는 하나, 그 작품의 사람들은 다소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내어서 초기 작품들부터 마크로스코의 추상표현주의의 노선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반인반수를 표현한 작품은 대체 어디서 부터가 반인이고, 반수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형채에 가까웠다. 


색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작품들은 형태라는 것을 버리게 되었다. 작품들은 캐버스위에서 마치 그려지고 싶은데로 그려진 듯한 생각이 들었다. 물감이 흘러내려진 부분은 그저 흘려진 채로, 혹은 수없이 덧칠 해진 부위는 덧칠해진 부위가 색감이 드러나던 말건 그저 그려져 있을 뿐이였다. 그나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던 ‘신화의 시대’ 섹션이 감사하게 여겨질 정도로 색감의 시대부터는 그림의 형태가 없어서 도저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 였다. 일반적인 회화작품들은 작품의 디테일이나 혹은 작품의 선, 색채들을 흥미롭게 감상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할지 모를 작품들이 많았다. 화가의 깊이의 도달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이 그림이 화가의 깊이를 나타낸 그림인지 자체도 모를만큼 난해한 작품들 이였다. 이런 그림들은 '멀티폼'이라는 기법을 사용한 것인데, 마크 로스코도 작품의 형태를 봐주길 바라기보다는 색감과 살아숨쉬는 유기체로 꿈틀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부 작품들 속에서 상승하는 색감들과 혹은 폭파하여 흘러내리는 듯한, 비이커에 담겨 회전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색감이 느껴져서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황금기'로 접어 들면서 그림은 이래없이 단순해 지기 시작했다. 많이 써봐야 4가지 정도의 단색으로 명료하게 그림을 나타내어 그 색감외에 다른색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듯 하였다. 실제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색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들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듯하였다. 가지각색의 색들은 어떤 작품들의 색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능’한 것이 아니라 색깔 그 자체를 색으로써 ‘감상’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런 뚜렷한 색들이 모여 질서와 체계를 잡고 각자의 성향을 마음껏 표출하는 모습은 색감 본연의 모습을 충실히 나타내는 듯 했다.

작품 전시가 '벽화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작품들은 얼핏 한두가지 색 이상은 표현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니 색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색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각자의 색감들이 모여서 또다른 색으로, 또는 그대로 뭍혀버리는 색들이 혼합과 규칙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방법을 표현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이 점점 시간이 흐를 수록 좀더 단순해지고 작품의 색깔이 명료해지는 것 이었다. 그것은 검은색이라고 칭하기엔 너무 탁했고 그렇다고 다른 색이라고 칭할 수 도 없는 색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그려가면서 그때부터 마크 로스코는 색감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작품들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며, 마치 불빛 한줌 없는 외딴 곳에 혼자 버려진 듯한 고독감을 주는 색감들이 주를 이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림들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바로 전시회 안쪽에 따로 ‘로스코 채플’을 재현한 공간이었다.

로스코 채플이란 미국 휴스턴에 있는 공간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통하여 침묵과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 위로와 화해, 치유를 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깊은 명상과 몰입으로 인간의 슬픔을 해소 할 수 있고,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재현된 로스코 채플에 가만히 앉아 다크 페인팅이라 불리는 매우 치명적이게 어둡고 우울한 색감의 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자니, ’오히려 이런 어두운 작품들과 어두운 전시회장 분위기, 그리고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콘트라베이스의 구슬픈 음율이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우울한 감성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라는 매우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로스코가 원했던 인간의 내면의 가진 슬픔은 사실 누구에게나 자리잡혀있고, 그런 감정들을 굳이 꺼내고 들쳐내려고 애쓰는 듯하여서 로스코 채플 재현장은 나에게 그리 해소의 공간으로 여겨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부활의 시대라는 마지막 섹션을 통하여서 나는 마크 로스코가 얼마나 자신의 작품에 애착을 자기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작품이 허영심 가득한 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을 끔찍히도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영혼을 부여한 만큼 작품을 자식처럼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본질도 이해하지 못하는 속물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아 했다고 한다.


그런 마크 로스코의 애착과 작품의 대한 순수성의 감탄 하며 전시회를 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이 카페트 혹은 메모장 연필, 엽서등으로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마크 제이콥스인마냥!) 마크 로스코가 보고있다면 분노로 울부짖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화가의 신념을 배려하지 못한 한가람 미술관에도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나에게 추상 표현주의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보여준 것 같다. 단맛은 색과 그림이라는 것은 반드시 형태를 갖추어야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쓴 맛은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저 벽을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작품들은 순전히 화가의 감성과 내면을 통해서 그려졌다, 그 와 비슷한 감성을 지닌 채로 그림을 보지 않는다면, 그 감성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상, 동시대 화가들의 기풍, 그의 감정적 상태들이 한데 어우러져 표출된 작품들은 현대를 사는 나에게 그리 와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허영심에 빠져 작품을 완전히 이해 한냥 떠들어 대는 사람들보다 자신의 감상에 진솔되게 표현하고, 스스로 이해한 부분까지 인정하는 태도가 어쩌면 마크 로스코가 나타내던 가식없는 순수한 색감 그대로의 모습 아니었을까.


덧글

  • gvw 2015/06/10 23:12 # 답글

    저는 엽서 파는 건 괜찮았는데, 입구에 스티브 잡스가 어쨌느니 저쨌다고 대문짝만하게 써있던 것과 나오는 길에 각종 유명인들 싸인이 걸려 있는 것이 무척 거슬렸어요.
  • 스윔굳 2015/06/13 20:35 #

    저도 그사인 쓱보고 나왔는데, 뭔가 찝찝하드라고요. 전시내내 마크 로스코에 안빈낙도한 태도를 보아서 그런건지 ..ㅋ
  • 아미노산 2015/06/18 04:22 # 삭제 답글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어제 갔다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했거든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긴 하네요.
    그래도 그와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고 소통하고자한 관람객이라면 마크 로스코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요?
    한가람측은 할말이 없지만요 ㅎㅎ
  • 스윔굳 2015/06/25 16:15 #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너무 어렵더라구요 ㅠ 이해하지못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듯한..
  • 아미노산 2015/09/03 16:56 # 삭제 답글

    저도 볼때는 그냥 보고 나중에와서 검색하고 마크로스코를 알아가면서 이해하게됬어요 ㅎㅎ 배경지식이 조금 있어야 관람할때 좋을 것 같더라구요. 여태까지는 그림만 감상했는데 이젠 알고보니까 뭔가 더 재밌는 느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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