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hone에 적는 시


위대한 이라고 쓰고 허무한 이라고 읽다 -위대한 개츠비 텍스트



시간이 남아돌아버리는 바람에 우연히 눈길을 돌린 책장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고전의 전설을 발견하였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은 누구라도 한번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일본에 주인공 이름을 딴 개츠비라는 헤어스타일링 제품도 있다. 일본식 발음은 보통'갸스비'로 불리운다) 이 소설을 읽었든 읽지 않았던 제목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제목이 주는 신선함 때문일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라는 제목은 그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느낌이 든다. '왜 위대한가?'라는 의문과 '개츠비는 누구인가?' 라는 두가지의 의문점을 제공하며, '위대하다'라는 의미가 성공과 명예, 부, 입신 양명의 이미지를 나타내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위대하게 되었는가?" 라는 세번째 의문점을 갖게된다. 제목에 매혹되어 책을 구입하게되고 또 그 내용에 다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즐거움을 주는가?

1. 캐서웨이 닉의 시각
위대한 개츠비 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캐서웨이 닉이라는 제 3자의 필터를 통해서 바라본 개츠비라는 점이다. 우리는 닉을 통해서 개츠비를 보고, 닉을 통해서 개츠비라는 인물을 파악하게 된다.
인문학 도서가 아니므로 닉은 개츠비라는 인물을 감상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평가 내리며 우리에게 당신은 어떤식으로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그 평가하는 과정속에서 '과연 개츠비는 그런 인물인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평가를 번복하게도 만든다. 또한 닉이 개츠비의 심상을 헤아리고, 비유적으로 그의 이상과 현실사의 괴리를 표현했을때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을 맛볼수있다. 우리는 닉이라는 인물의 의견을 수용하기도 공감하기도하며 때로는 그의 표현력의 감동하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2.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개츠비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이상한 집착을 가지고 행동한다. 데이지는 속물중에 속물 인 여자이다. 전혀 이상적인 여자라고 불릴수 없다.
오히려 철없고, 돈을 밝히며 도덕적으로 결여되있기도 하다. 그런 데이지를 왜 개츠비는 사랑하게 된 것인지 의구심이 마저 든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에게 맡는 적절한 여자를 끼워 맞췄다는 표현이 더 그럴싸하다.
그가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 그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개츠비가 젊은 시절 데이지를 만난 감상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녀는 그가 알게 된 최초의 '훌륭한'여자 였다.
그는 숨겨져 있던 다양한 능력으로 부유층 사람들과 접촉하게 됐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가시철망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못 견디게 탐났다.'
자신의 완벽한 새 인생에 버금가는 완벽한 사랑이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종반에 다다르면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자신의 남편인 톰 뷰캐넌을 한번도 사랑한 적없다고 말하기를 강요한다.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소. 저 사람한테 사랑한 적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요. 그럼 모든 게 영원히 지워지는 거요, 당신은 그를 사랑한 적 없소"
이 처럼 개츠비는 자신이라는 인간에 대한 만족과 자신의 인생의 완벽한 커리어를 원했기때문에 자신의 여자가 남을 사랑했었다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상태까지 온 것이다. 그것에 대해 닉은 관조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그 동안 데이지를 사랑해 온 스스로에 대한 이해 같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개츠비의 집착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게된다.

3. 과연 개츠비는 위대한가?
사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은 작가인 F. Scott Fitzgerald가 지은 제목이 아닌 편집장이 지은 것이다. 초반에 언급한 매력적인 제목이라는데에 편집장의 상업적인 전략도 포함되어있겠지만, 그 제목에는 아이러니한 의미가 있다.
사실 내용을 읽어봤을때 '개츠비는 위대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개츠비는 위대하다기보다는 허무하고 허망한 인생을 살다 갔기 때문이다. 과거와 완벽함에 집착하여 어리석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제목으로는 '허무한 개츠비의 삶'이 오히려 내용을 포괄하기에는 적절하다. 하지만 왜 '위대한'이냐?
사실 등장인물중에 제대로 도덕적인 인물은 한명도 없다.
캐서웨이 닉이라는 인물은 고향에 자신의 약혼녀를 두고왔음에도, 뉴저지에서 새로운 여자를 아무런 죄책감없이 만나고, 톰뷰캐넌은 데이지라는 아내가 있음에도 따로 애인을 만들어 두었다. 또한 캐서린은 골프선수로써 부정행위를 한 혐의가 있는 인물이고 데이지는 개츠비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말에 톰에 대한 죄의식을 보이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개츠비라는 인물은 극중에서 유일하게 한사람에게만 자신의 사랑을 바치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비록 비뚤어진 마음이라하여도) 그러기위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고 끊임없이 집착하여 과거를 바꾸려는 그의 노력은 어쩌면 '위대하다'라는 평가가 들어갔다고 볼수 있다. 나는 캐서웨이 닉이라는 인물이 후반에 갈수록 개츠비를 옹호하고 개츠비를 야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인물로 평가한 것은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조의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상에 대한 광기로 파국을 맡게된 故개츠비에 대한 예의이자 위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그의 삶은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한 삶이라고 일컷을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찾아오지않는 그의 장례식이 그렇게 설명해주는 것이다.

4. 구성
개츠비라는 소설은 술술 잘읽히는 책이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감탄하게 되는 명문들도 있고, 사건을 발생시키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구성이 탄탄한 작품이다. 구중 탁월한 구성은 개츠비라는 인물을 닉이 만나게 되는 과정이다. 초반에 주로 닉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는데 개츠비라는 인물은 안나오고 계속해서 주위의 인물들이 개츠비에대해서 언급하거나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독자는 "도대체 개츠비가 누구야?" 라는 궁금증이 샘솟는다. 사실 '도대체 개츠비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소설전체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스토리의 맥이다. 이제 알았다고 생각했던 개츠비는 그 개츠비가 아니였고, 또한 그 개츠비는 그 개츠비가 아닌(?) 독특한 호기심으로 개츠비라는 인물을 쫓아가게 만든다. 또한 후반에 주요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인물의 행동, 눈빛, 말투, 일촉즉발에 상황이 머리속으로 상상되니 이렇게 흥미로울수 없다.


과거를 돌이키려고 했던 개츠비는 어쩌면 미국의 가장 찬란했던 1920년대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상과 너무도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꿈과 이상에 대해 이룰 수 있다는 광기어린 집착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한 허무하고도 비극적인 결과는 어쩌면 그 시대상에서 돈에만 집착하는 속물주의자들에게 모종의 메세지 였을지도 모른다.


그시간에차라리글을써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는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라는 어느 먼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뒤짚어 생각해 보니 그 언젠가란 도대체 언제인가?
사회적 안정을 얻고 나서인가?
어느정도 재력을 갖추고 인가?
아니면 은퇴후에 늙은이가 되고 부터인가?

하루종일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낸 얘기를 그녀에게 했을때 "그 시간에 차라리를 글을 써"라고 했던 말이 요즘 자꾸 떠오른다.




시드니 주립 미술관 과 '수백억이라도 나에게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작품이라면, '나에게 아무런 감동도 없는 작품'이다. 물감

이날은 시드니 주립 미술관에 방문하여 각종 미술작품과 조각품들 그리고 각종 현대미술작품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술품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전해준다. 아름다운것은 무엇인지, 또한 인간의 위대함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인간의 기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든다.

시드니 주립 미술관에 대해서 설립일이나 운영시간들을 퍼와서 얼마든지 적을 수 있지만, 그건 어디 블로그, 어디 인터넷에서든 접할 수 있기에 나는 오늘 미술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나는 미술에 대한 조예는 정말 없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며 진지하게 감상하고, 네임벨류를 버리고 누구보다 주관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려고 노력하는 주의이다. 오히려 아는 것이 쥐뿔도 없기에 좀더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을 감상한다. (오디오 가이드는 절대 듣지 않는다)

나의 미술 감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한 후 화가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림이 마음에 들었으나 생소한 화가일 경우 화가의 화풍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름을 따로 기록하여 둔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에는 생소한 화가이던 유명 화가이던 오래 감상하는 일은 없다. 그런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감상한뒤 기억 남았던 그림들을 다시 처음부터 돌면서 재 감상한다. 그런 후 나와서 인터넷으로 화가의 작품을 검색하여 단순히 '내가 감명을 받았던 그 작품'만 그런 화풍과 느낌인지 아니면 다른 작품들도 같은 방식과 화풍으로 그리는 지 확인한다. 첫번째의 경우 기록해두었던 이름은 제거하고 그림만 기억하고, 두번째일경우 이름을 기억하여 추후에 다른 방식으로 해당 화가의 작품이 전시될 시 감상할 수 있도록 기록하여 둔다.

이런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적어도 한 전시회에 전체 작품을 감상하는데 4~5시간은 소요가 된다. 그야말로 하루종일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10~20분까지 감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작품이 많으면 그야말로 녹초가 되곤한다. 운동화 필수.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미술 감상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뼈저리게 느낀바가 있다. 이전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마크 로스코에 작품을 보고도 느낀 것이지만, 그림이라는 것에 대단한 거품이 끼어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내가 유난히 감명 깊었던 작품의 화가는 Lucian preud (루시안 프로이트)  였다. 물론 시드니 주립 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 세잔, 클로드 모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정말 그들의 작품인가 할 정도로 초라였기 때문에 평소에 그들의 작품을 좋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물론 피카소에 작품은 그냥 슥보고 지나쳤다.


때때로 우리는 '모른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남들 눈에 무식하다고 비칠까봐 두려워 말못할때가 많다. 그 잘난 유명 화가의 수백억하는 작품이 나에게는 아무런 감동으로 오지 않을 수 도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진 이유를 덧붙여가며 작품을 찬양해댄다. 마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처럼 말이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옷이 눈에 보인다고 거짓말하는 백성과 신하들- 자신이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비싼 작품이 대단하다고 거짓말하는 관람객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어떤 것이든 끊임없이 부여할수 있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뱅크시의 유명한 암각화이다. 영국 런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된 이 그지 같은 돌덩이는 뱅크시라는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대영 박물관에 몰래 전시 해 놓은 작품이다. 그런데 박물관 관계자나, 관람객들은 8일동안이나 이 돌덩이가 작품인지 알고 제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17세 소년은 현대 미술을 감상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런짓을 한것이 분명하다. 결과는 역시 소년에 생각대로 후에 수십명이 모여서 저 평범한 안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어대는 사태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

어느 평범한 벽을 보더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관찰하면 강제로라도 의미가 부여된다. 세상 모든 작품들이 화가의 노력이 깃들어 있기에 어느 작품이라도 함부로 비난할수 없지만 , 그렇다고 모든 대단하다는 작품에 관람객이 흥미와 관심을 부여 하여야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성향과 작품의 성향이 일치할때 비로서 작품에 강렬한 영감과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피카소의 작품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듯 누군가는 루시안 프로이트에 작품에 아무것도 못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과 철학에서 나온 취향이기에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차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해서는 안된다. 그 그림 가격의 차이가 비록 수백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저 작품을 볼때 가격표나 화가이름을 보고 작품을 감상하려고 하지말고, 순순하게 작품으로 써만 감상을 하라고 얘기 하고 싶다. 물론 나 스스로도 항상 미술관에 들어가기전에 다잡는 생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시드니 주립미술관(사진 촬영이 허용되는 미술관) 에서 봤던 감명깊게 봤던 작품들을 올리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James Tissot






Lucian freud




Jane Sutherland



마지막으로 지하2층 현대 미술관에서 여유롭게 구경(?)하다가 유일하게 감상한 작품
Bernd Becher & Hilla Becher (베른트 베허 앤 힐라 베허)


영화'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때는 조선인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던 일제강점기
간도에서 함께 자란 두 청년 윤동주와송몽규.
시인이 되고 싶지만 집안의 반대와 시대적 상황에 매번 부딪히는 윤동주와
직접 행동하여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했던 송몽규
둘은 오랜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현 시대를 대처하고 있었기에
끊임없이 대립하고 성장해 나간다.

처음에 이 영화가 흑백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색감이 주는 심미성이나 고화질 색감에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어쩌면 답답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실제로 영화를 감상해보니 흑백 영화라는 이질감보다는 매우 담담하고 관조적으로 스크린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런 시각이 시인이 되고 싶고, 조선어를 쓰고 싶고,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윤동주 시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송몽규라는 독립 운동에 능동적이고 실천하려는 인물과, 성격적으로나 독립 운동에 있어서나 다소 내성적이고 정적인 윤동주라는 인물간의 이념적 대립이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를 잘보여주었다. 직접 행동하고 상황에 맞게 이념을 변화하는 것이 옳은 독립 운동의 길일까, 아니면 이념적인 중심을 잡고 문학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하나 하나를 깨우는 것이 옮은 독립 운동의 길일까?  
행동하는 것은 영화의 결말처럼 매우 극단적이고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고,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의지는 영화에서 처럼 매우 미미한 결론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청춘들에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없이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송몽규, 윤동주 둘은 비극적인 상황을 개선하려는 방식은 달랐지만, 서로가 가지고 있던 '조선사람으로 살고 싶은' 그 당연하고도 순수한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그런 이념적 대립도 좋지만 이 영화에 좋은 장면은 따로 있다. 영화 속에서 중간 중간 13편의 시를 나레이션으로 읊어주는 장면이다.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최대한 시의 작성 연도와 영화의 연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비극적인 상황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읊어 주는 시는 따뜻하게 어우러져 가만히 심금을 울린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가장 처음 접하는 경우는 대개 국어책 교과서 일것이다. 그때 우리는 시를 읽었던가? 아니면 시를 풀었던가?
친구는 '처음으로 시를 만난것 같다.' 라고 했다.(수능 언어 만점 받음.) 시는 항상 풀고 해석하고 답을 도출해야만하는 '문제'중에 하나였는데, 그게 아니라 시를 느끼고 시의 구절에 감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시를 읽은 것이다. (한국 교육에 폐해를 넌지시 얘기하려다 말고) 시를 시 로써 접하게 만들어 준것만으로 이 영화가 가진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숨을 거둔 29세의 나이까지를 다루는 전기 영화이기때문에 2시간안에 일대기를 나열하고 감동을 주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애를 전부 표현하려고 하다보면 연출적이 면에서 중간 중간 개연성이 없어져버리거나  배우들에 감정선이 급격하게 변화하여 관객들이 공감하기 어려워져서 감상에 흐름이 어긋나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시간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내용을 간결하게 편집하여 관객들의 감정이입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간다. 연출력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한 장면마다 아름다움과 시와 안타까움, 애잔함, 따뜻함등 여러 감정이 어우러져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의 시 같고, 송몽규의 열정 같기도 하다.
좋은 시집을 한편 읽은 것 처럼, 조용히 두눈을 감고 되새겨 보기 좋은 영화이다.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이여진'이라는 역할을 연기한 여배우인데, 아마 동주라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니였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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